[오션 뷰] 북극항로가 우리를 부른다
[오션 뷰] 북극항로가 우리를 부른다
김현겸 팬스타그룹 회장·부산크루즈산업협회 회장 국제 해상 물류망이 흔들리고 있다. 호르무즈해협과 홍해에 긴장이 높아지면서 세계 경제 동맥인 주요 해상 교통로가 위협받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은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가 통과하는 핵심 에너지 관문이고, 홍해와 수에즈운하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대표적 물류 통로다. 이들 항로 대신 아프리카 희망봉으로 우회하면 운항 기간은 훨씬 길어지고 연료비와 보험료는 치솟는다. 상황이 악화되면 해운업뿐 아니라 제조업과 국가 물류망, 에너지 안보까지 흔들린다. 수출로 먹고 살아온 대한민국에는 대체 수단 마련이 절실하다. 대안으로 북극항로가 주목받고 있다. 북극항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최단 해상 루트로, 500년 이상 탐험과 개척의 역사가 있다. 유럽은 오래전부터 북극해를 탐험했고, 20세기 들어 러시아는 시베리아 광물과 에너지 자원 수송을 위해 항로 개발을 추진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의 항해 성공, 세계 최초 원자력 쇄빙선 ‘레닌호’의 등장은 북극항로 개척사의 중요한 이정표다. 최근엔 북극 해빙이 감소하면서 상업적 가능성이 높아졌고, 중국이 2017년 빙상실크로드(Polar Silk Road, 북극항로) 개발에 뛰어들었고 다음 달 상업운항에 돌입한다. 북극항로의 매력은 거리와 시간 단축으로 설명된다. 부산에서 독일 함부르크까지 수에즈운하를 이용하는 항로는 약 2만 1000km에 달한다. 희망봉을 경유하면 2만 7000km에 육박한다. 반면 북극항로는 약 1만 3000~1만 4000km다. 수에즈 항로 대비 최대 30~40%의 거리 단축 효과가 기대된다. 북극항로의 경제적 효과는 운송비 절감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학에서 이를 ‘제번스의 역설’(Jevons Paradox)로 설명하는데, 19세기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는 석탄 사용 효율이 높아지면 석탄 소비가 증가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를 물류에 적용하면, 북극항로가 운송 기간과 물류비를 크게 낮출 때 비용 절감 뿐 아니라 새로운 교역 수요와 물동량이 창출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북극항로 가치는 단순한 대체 항로를 넘어 새로운 경제권과 물류 생태계를 형성한다. 북극해는 인간에게 가장 가혹한 바다로 알려졌다. 겨울철 결빙과 유빙 이동, 예측하기 힘든 기상, 안개와 화이트아웃 현상은 일반 항로와 비교할 수 없는 위험을 안고 있다. 러시아 영해 통과 문제, 국제 제재, 높은 보험료 등도 해결 과제다. 내달로 예정된 시범운항에서 연료 소모량이 얼마나 될지, 쇄빙 비용과 보험료는 어느 수준일지, 화물은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는지, 정시성은 확보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 검증은 필수적이다. ‘시장성이 없다’ ‘경험이 없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인류 역사의 모든 혁신이 비슷한 평가를 처음에 받았다. 1950년대까지 항만에는 수많은 인부들이 화물을 하나씩 선박에 싣고 내렸다. 시간도 오래 걸렸고 파손과 도난 위험도 컸다. 당시 등장한 컨테이너는 비현실적 발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업혁명 이후 가장 위대한 물류 혁신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세계 경제와 전자상거래, 글로벌 제조업 기반도 컨테이너 혁명 위에서 성장했다. 정작 그 혁명을 일으킨 기업 미국 시랜드(Sea-Land)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컨테이너라는 혁신 자체보다 혁신 이후의 생태계 구축과 국가적 지원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북극항로도 마찬가지다. 항로 하나를 개척한다고 완성되진 않는다. 내빙 선박을 건조할 조선산업이 필요하고, 극지용 기자재 산업이 따라와야 한다. 해빙 예측 기술과 위성통신 체계가 구축돼야 하며, 금융과 보험, 법률 서비스도 발전해야 한다. 북극항로 개척이 국가 프로젝트인 이유다. 일본은 2022년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해 반도체와 에너지, 통신, 항만, 선박 장비 등 국가 경쟁력과 관련된 산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경제 안보 분야에는 정부가 위험을 일부 부담하고 산업 지속성을 뒷받침하겠다는 취지다. 대한민국도 비슷한 관점이 필요하다. 민간 기업이 도전하되, 국가가 제도와 금융, 정보, 외교 분야를 책임져야 한다. 다행히 부산·울산·경남은 세계 최고 조선산업과 항만, 해운 역량을 갖췄다. 부산항은 선박 정비와 친환경 연료 공급, 해운금융과 해사법률 서비스가 집적된 북극항로 허브로 성장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섣부른 낙관도, 무조건적인 비관도 아닌, 오로지 ‘철저한 검증’이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정주영 회장의 울산조선소 건설에서 우리는 그 중요한 사실을 이미 충분히 배웠다. 옛 시인들은 먼바다로 떠나는 항해자를 운명에 맞서는 영웅으로 묘사했다. 북극항로 개척 역사도 그렇게 씌어질 것이고 우리는 그 항해를 시작할 것이다. 출처: 부산일보 (2026-07-26)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6072617504957140